김의기 칼럼 ”글쓰기는 이렇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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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성 기자
기사입력 2014.08.29 19:12

 

▲ 김의기의 인문학 칼럼     © 박희성

[한국언론사협회=김의기 칼럼]유럽에는 노천카페가 많다. 유럽사람들은 노천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 같다. 실내 카페도 아예 테이블과 의자를 바깥을 보도록 배치하는 경우도 많다. 파리의 상젤리제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오! 상젤리제! 상젤리제 소리만 들어도 내입에서는 상젤리제 노래가 자동적으로 나온다. 더구나 여름, 자신을 시원하게 노출한 여인들을 감상하는 것은 유럽여행의 백미가 아닐까? 유럽의 여인들은 자신에게 주는 시선에 불편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응답해 온다. 오히려 쳐다보지 않으면 서운해 하는 것 같다. 이 자신감이 더욱 여인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어느 날 친구인 유럽 여인과 같이 노천카페에서 지나가는 여인들을 감상 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난 길가는 여자들을 보는데 자기는 남자들을 보겠지?”
그녀의 답변은 의외였다.
“아니, 나도 여자들을 봐요.”
난 깜짝 놀라 “왜 그래요?” 하고 물어 보았다.
“여자들이 어떤 옷을 입는지, 무슨 구두를 신는지, 장신구는 무엇을 하는지 관찰해요” 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여자와 남자는 관점이 다르다. 문제는 유럽여인들은 다른 여자들이 입는 옷을 보고 따라 같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남이 그 옷을 입으면 같은 옷이 있어도 절대 그 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성을 강조하는 유럽인들의 고집을 알 수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이미 쓴 것은 절대로 쓰면 안 된다. 누군가 그 글을 썼다는 것은 이미 그 아이디어가 진부해진 것이다. 글 쓰기는 진부함을 거부하는 힘이다. 언론에 실리는 칼럼이 읽히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칼럼을 읽어 보면 이미 다 아는 얘기, 누군가 이미 말한 것을 재탕, 삼탕 쓰고 있어 답답하다. 물론 재탕, 삼탕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글은 이미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특히 유행처럼 일제히 같은 내용을 쓰는 칼럼은 파리지엔느 보다 수준이 낮다고 생각된다. 평가가 너무 박한가?

 

여름 백사장에 가면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와 바닥에 예쁜 그림을 그린다. 물이 빠져 나가면 모래사장의 조그만 구멍에 보글보글 물방울이 올라오기도 하고, 앙증맞은 작은 조개나 주먹을 치켜든 게도 보인다. ‘해변의 커프카’에서 무라까미 하루키는 그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작은 파도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해변에 부서진다. 물이 빠지면 칼로 판 것 같은 부드러운 모양의 무늬를 모래 표면에 남긴다. 작은 물방울도 보글거린다.”


정말 아름다운 문장이 아닐 수 없다. 무라까미가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으며 발등을 간지럽게 문지르는 파도를 관찰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한편 같은 장면을 다르게 묘사하는 작가도 있다.

“밋밋한 모래더미가 빠르게 달려오는 파도를 탐욕스럽게 큰 숨으로 빨아 들인다. 파도가 부서지면 혀로 핥는 것 같은 허무한 한숨소리.”


존 반빌(John Banville)의 ‘바다(The sea)’에 나오는 문장이다. 반빌의 해변은 무라카미의 해변처럼 아름답지 않다. 반빌의 해변은 불타는 욕망의 현장이다. ‘바다’를 읽다가 처음에는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몸에 꽉끼는 검정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을 보고 수영복이 ‘탐욕스러운 물개 가죽’ 같다고 표현하는 문장을 접했을 때 나는 여기 새로운 문학이 탄생하고 있음을 알았다. 파도가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몰려 오는 게 아니라, 햇볕에 지져 불타는 뜨거운 모래더미가 시원한 물을 갈망하여 파도를 부르기 때문에 파도가 달려온다는 것이다. 달려온 파도는 모래와 얽혀 뒹군다. 물이 빠져 나가면 허무한 한숨소리. 욕망이 충족된 것일까? 모래의 열기는 시원하게 식었다.

 

무라까미의 해변은 달달하다. 무라까미는 세상을 속인다. 하지만 반빌은 이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안다. 무라까미의 문장으로는 세상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세상을 속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장이 필요하다. 새로운 접근방법,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누구나 청소년 시절에 한번쯤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빠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다 속 같이 깊은 어둠 속에서 잠에 취한 듯 몽롱한 의식을 뚫고 들리는 소리, “새는 알에서 벗어나려고 투쟁하고 있다. 알은 세상이다. 누구든지 새 생명을 얻고 싶은 사람은 세상을 부숴야 한다,”는 데미안의 메시지는 청소년들에게 많은 공명을 일으킨다. 꿈 많은 청소년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알에 갇힌 듯 갑갑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세상을 부숴 버리고 싶어 한다. 알을 부숴야만 새 세상에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알을 부수고 세상에 나가려면 진부한 문장으로는 안 된다. 새로운 사고, 새로운 접근방법, 새로운 문장이 필요하다. 누구에게 배운 이론, 빌려온 아이디어는 감동을 줄수없다. 자기가 겪은 자기의 얘기를 써야 한다. 오랫동안 글을 써 왔지만 글을 쓰는 행위만이 내가 진실하게 살아가는 단 하나의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나의 글쓰기도 끝날 것이다. 그날까지 나의 언어로 말하겠다. 나만의 언어, 영원히 끝나지 않는 나의 언어로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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